부활 후 첫번째 주일 - 믿음 없는 도마?
전명환 2016-04-05 10:40:51 79

 

 


최주훈님의 사진.
최주훈


<믿음 없는 도마?>


오늘은 부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이날을 칭하는 특별한 이름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Quasimodogeniti infantes’라고 부르는데, ‘아이처럼 새로 태어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주일이 주님이 부활하신 큰 부활의 날이라면,  

오늘은 우리가 거듭나는... 작은 부활절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교회력 본문을 보면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다음에 우리의 부활을 이야기 한다면 그래도 믿음 좋게 만드는 그런 성경 구절이 나오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아이처럼 거듭나는 주일’에 엉뚱한 인물이 소개됩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제자 ‘도마’입니다. 

 도마에겐 항상 이름 앞에 따라 붙는 말이 있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라는 수식어입니다. 오늘 이 도마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거듭나는 날’과 ‘의심 많은 도마’, 어찌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관계 같습니다. 우리의 통념은 믿음 없는 사람의 전형으로 도마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성경도 그렇게 전하고 있을까요? 오늘 이 질문을 가지고 말씀을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요한복음을 단숨에 읽어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을 다루는 대목에서 가장 하이라이트가 되는 부분에 이 도마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얼 말하려고 도마의 이야기를 부활의 정점에 등장 시키는 것일까요?

2천 년 전으로 돌아가 봅시다. 도마는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삼 년 간 산전수전 다 겪은 직계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로 곁에서 경험했습니다. 멀리서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숨을 거두고 장사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마음이 어땠을까요?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장 가까이서 손쓸 틈도 없이,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믿었던 선생님이 자기 눈 앞에서 그리도 무력하게 죽는 것을 보았을 때 그 가슴은 어떠했을까요? 단지 가슴 아프다, 비통하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었다고 생각했던 선생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도마는 듣게 됩니다. 그러자 의심이 생기게 됩니다. ‘진짜일까? 설마? 그럴 리가? 내 선생님이 다시 사셨다고 하는데 나는 믿을 수 없다.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을 내가 만져 보아야 다시 사신 것을 알겠다. 창에 찔려 돌아 가셨는데 창에 찔린 그 옆구리를 내 손가락으로 만져 본 후에야 내가 부활사건을 믿겠다.’

이것이 비탄에 잠겨 있던 도마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두고 많은 신앙인들이 ‘의심 많은 도마’ 또는 ‘믿음 없는 도마’, 심지어는 ‘불경한 도마’라는 말까지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불경합니까?

이제껏 남들이 말하고 있는 도마에 대한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이 시간만큼은 도마의 이야기를 여러분의 이야기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도마가 가진 이런 질문들을 아주 솔직한 신앙이라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도마는 지금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아주 솔직하게 우리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만져보아야, 느껴 보아야, 눈으로 보아야 믿겠다.”

물론 성경은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더욱 복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말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턱대고 아멘하는 신앙과 다릅니다. 성경이 전하고자하는 신앙은 그렇게 생각 없이 따라오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신앙에 대해 물어야 하고, 의심해야 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의 복음서 말씀은 도마의 이야기를 통해 이렇게 질문하는 신앙이 참으로 복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도마와 관련된 실제 역사 한 토막입니다. 베드로를 포함하여 사도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이 부활 이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 부활 소식을 전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마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가장 멀리 간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서 고작 멀리 가 봐야 로마밖에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역사를 보면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은 아주 멀리 갔다고 말하는데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선인 소아시아 지방까지 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심 많은 제자, 믿음 없는 불경한 제자라고 부르는 도마는  

그 경계를 뛰어 넘습니다. 인도까지 갑니다. 


선교역사를 보면, 도마는 서기 52년에 남인도 케랄라 주까지 도달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20년동안 예수를 전파하고 서기 72년에 남인도 마드라스라는 곳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의심 많던 제자, 믿음 없는 제자 도마가 자기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본 다음 확신에 차서 인도까지 갔던 것이죠. 

저도 아직 가보진 못했지만 인도 케랄라에 가면, 이 도마를 기념하여 세워진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교회 이름은 ‘성도마교회’ (Mar Thomas Church)라고 하는 정교회입니다. 교회 성도 수는 약 백 여명 정도 되지만 이 교회가 자부하고 있는 것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도마가 보여주었던 신앙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다 잘 알 듯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 가운데는 베드로처럼 설교 한 번에 삼천 명씩 회개하고 구원하는 능력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도에 세워진 도마교회는, 도마가 예수님의 손과 발, 옆구리를 만졌던 것을 기억하고, 그 신앙을 본받아 인도의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손과 발을 만져가며 기도하고 섬기기 위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지금도 권력의 창에 찔려 죽어가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핍박 받는 사람들, 가장 작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힘을 모으고, 기도하고 섬기는 교회로 소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작은 곳에서 봉사하는 교회’, ‘어려운 자를 손으로 만져 믿게 하는 교회’입니다.  

 

이 땅에는 의심이나 질문 한번 가지지 않고도 아멘의 미덕으로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도마교회처럼 손으로 만져가며 작은 일에 충성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공동체의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아이처럼 거듭나는 부활의 둘째 주일'에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능력자의 교회보다  

도마의 교회처럼 약자들의 손과 발을 만져가는 교회가 되라는 것.....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런 신앙의 공동체, 이런 교회도 이 땅에 필요한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이기 때문에 도마의 이야기가 요한복음의 부활기사의 하이라이트로 등장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봅시다.
다른 것은 몰라도, 도마는 한 가지 면에서 만큼은 확실했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을 때 거짓말로 보인다고 남을 속이거나 자기를 기만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자기 필요와 감정에 따라믿는 체 하지도 않았고, 주위 분위기에 휩쓸리는 신앙의 태도를 견지하지도 않았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확인해 봅시다. 도마는 삼년 간 동고동락했던 선생님의 죽음을 목도하고 동료들과 똑같이 비탄에 잠깁니다. 그런데 동료들이 다 만났다고 하는 부활의 주님을 도마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만났다고 하는데, 자기만 못 만났습니다. 이 쯤 되면 그냥 대세를 따라 조용히 그러려니 하며 어물쩡 넘어갈 만도 할텐데, 도마는 타인의 신앙, 분위기를 따라 움직이거나 대세를 따르는 신앙의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도마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비탄 속에서 8일 동안 기다렸다는 사실입니다. 그 초조함 가운데서도 섣불리 움직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솔직한 신앙의 자세로 의문을 가지고, 주님의 몸을 만지길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솔직한 의심을 품은 도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확인하듯, 부활하신 주님이 도마 앞에 오십니다. 그리고는 상처에 손을 넣어보라고 권하시고 도마의 신앙을 격려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솔직한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복음입니다. 주님은 비탄과 의심에 쌓여 있어도 솔직한 마음을 견지하는 자에게 반드시 찾아오시고 그 의문을 풀어 주십니다.

혹시 우리 중에도 신앙에 대한 의심을 가진 분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든 예수에 관해, 부활에 관해, 하나님에 관해 의심할 수 있습니다. 질문이 있으시면 하십시오. 질문을 갖는다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막고 정죄하는 것이 죄입니다. 도마도 했습니다. 마음껏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 기도 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8일만 참아 주세요. 8일 후에는 꼭 답변 주세요.” 

이 8일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은 아닙니다.  

8주가 될지, 8년이 될지, 80년이 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3일 동안 무덤에 계셨던 것이 상징적인 사건이듯이 8일 후에 주님이 도마에게 찾아오신 것도 그렇습니다. 도마는 8일 후에 답을 듣고 싶은데, 그는 언어로 깨우침이 필요한 사람이 아닌 몸을 만져봐야 했던 사람입니다. “나는 삶 속에 들어가야 한다. 증거를 봐야겠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는 도마처럼 증거를 통해 복음을 주십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고, 질문을 던지는 그 어떤 성도에게도 주님은 동일한 방법으로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솔직한 의심의 과정을 통과한 도마는 결국 가장 먼 곳 인도까지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는, 가장 멀리 복음을 전파한 사도가 됩니다. 

 

자 이제 오늘을 사는 우리를 돌아봅시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상은 믿음이 있는 체하고,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실상은 전혀 행동하지도 않고, 8일을 기다리지도 않고 쉽사리 돌아섭니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 순종하는 믿음, 좋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실상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체하고 순종하는 체 하면서 기다리지도 않는 짝퉁신앙은 아닌지요? 차라리 도마는 믿는 체 하지 않았습니다. 순전한 의심과 질문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신 앞에서 솔직하면, 신앙도 솔직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우리에게 본을 보여줍니다.

제가 이전에 어느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칠 때 일입니다. 한 학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 저는 일반학과 출신인데 그때 교회에서 청년부 회장도 했습니다. 열심히 했고, 당시에 교회 분위기가 소위 뜨거운 교회였기 때문에 남들처럼 뜨거운 신앙을 가져보려고 부흥회도 다녀보고 금식도 해보고 방언도 받아 보려고 몸부림도 쳤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남들이 다 했다고 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대체 진짜 신앙이 무엇인지 갈등하기 시작했고, 대학을 졸업한 후로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는 남들이 말하는 신앙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신학대학원에 다니면 교회 전도사도 해야 되는데 저는 제 자신의 양심이 찔려서 전도사를 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로 신앙있는체 하기 싫어서입니다.” 


이런 말을 하자 주위 학생들은 짐짓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이미 오랜 일이지만 아직도 그 때 모습이 선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친구가 가망이 없다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학생은 도마처럼 솔직한 신앙의 모습을 이미 갖추고 있고, 그렇게 고뇌하며 기다리는 그 학생에게 반드시 8일 후에 도마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찾아가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 루터교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루터교회가 항상 자랑하는 것은 우리가 종교개혁의 후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무엇일까요? 저는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신앙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항상 말합니다.

그 솔직함이란 질문을 갖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 그 누구도 타락한 교회와 교황 앞에 의심을 갖고 질문 던질 엄두를 내지 못했을 때, 루터는 의심을 가졌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 앞에 그 의심이 해결되자 목숨을 건 싸움에 돌입합니다. 

당시 사람들 눈으로 보자면 루터는 믿음 없는 자였고, 의심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기에 그는 정직한 의심을 품은 신앙인이었고, 의심하는 그의 질문을 통해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루터는 제2의 도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도마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도마가 가졌던 의심을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가 가졌던 신앙의 의심을 해결해 주시고, 그 의심은 새로운 삶의 발판 역할을 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의심은 바른 신앙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매우 파괴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심이 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린 아기가 좀 자라게 되면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말이 ‘왜’라는 단어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이런 ‘왜’라는 질문과 함께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믿음에 대해 질문하고 의심하면 믿음 없는 사람으로 오해 받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아예 의심할 생각도 못하고, 질문도 못하고, 괜스레 질문하면 목사에게 반항하거나 신앙 없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저급한 풍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정직한 모든 의심은 진지한 신앙을 만들어 가는데 필수적이라고 이해합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합시다. 정직한 의심은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의문을 품고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그 질문을 성도들과 나누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자꾸 연구하십시오.  

주님은 정직한 의심을 환영하는 분이십니다. 

제가 후배들과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라는 것입니다. 저는 질문하지 않는 학생들이  

공부 잘하게 된 케이스를 본 일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 했으면서도 이렇게 세상의 질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없이 그저 묻지마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를 향한 정직한 질문과 의심, 그 고민은 우리를 더욱 발전하게 만듭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작은 부활절, 새롭게 거듭나는 주일입니다. 바라기는 도마가 솔직한 의심과 질문의 통로를 넘어 위대한 사도로 거듭 났던 것처럼 이 자리의 모든 성도들과 한국교회가 거듭나길 바랍니다. 그리고 도마의 신앙을 본받은 인도의 교회처럼 우리의 교회도 낮고 천한 곳으로 들어가 약하고 가난한 자들의 손과 발을 만지며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교회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믿음 있다 하면서도 정직하지 못한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우리의 정직한 의문 속에 주님 찾아와 주시고, 그 의심의 벽을 허물어 부활 신앙의 견고한 성을 세워 주옵소서. 주님 주신 부활신앙을 가지고 이 땅에 믿음을 심고 믿음을 나누어주고 믿을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교회력설교)20160403 부활절 둘째주일 중앙루터교회 최주훈목사:
요20:19-31
믿음 없는 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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